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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6.10 이희호 별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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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10일 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셨습니다.
김대중평화센터는 "이희호 여사가 오늘 오후 11시37분 소천했다."고 밝혔습니다. 향년 97세.

이희호 여사는 그동안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노환으로 입원해 계셨다고 합니다.
이희호 여사의 임종은 차남 김홍업, 삼남 김홍걸 씨를 비롯한 가족들이 지켰다고 합니다.

엄혹한 시절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대통령 부부를 생사의 기로에 서게 했던 사람은 아직도 정정한데
피해를 입은 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시는 걸 보면 야속한 마음도 드는군요.

북유럽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도 이희호 여사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페이스북에 글을 남기셨네요.
글을 읽는데 그 마음이 와 닿아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문재인 대통령의 추모 글

또한 DJ(김대중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인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도 글을 남겼습니다.

가족들의 찬송가를 따라 부르려고 입을 움직이시면서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합니다.
빈소 준비관계로 내일 11일 오후 2시 부터 조문이 시작되며, 이희호 여사의 발인은 14일 금요일이라고 합니다.

박지원 의원의 페이스북 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은 이희호 여사에 대한 글을 써 보려고 합니다.

이희호 여사는 제15대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영부인 중 최장수한 영부인이라고 합니다.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때

이희호 여사는 1922년생으로 이희호 여사의 고향은 서울. 6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희호 여사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식을 일깨웠던 감리교(기독교) 집안의 두 남녀가 만나 결혼했고,
그들이 이희호 여사의 부모님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집안일을 했습니다.

학교에 못 다닌 게 한이었던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여자도 공부해야 해”라며 이희호 여사를 다독였다고 합니다.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왼쪽이 이희호 여사)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 이화여고),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대) 문과를 졸업(일제로 인해 2년만에 강제졸업)했습니다.

이화여고 시절(맨 오른쪽)

해방 직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대 사범대 영어과에 입학하여 대학 공부를 다시 시작합니다.

서울대 사범대 시절 이희호 여사

이후 3학년 때 서울대 교육학과로 전과하여 졸업하게 됩니다.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동기들과 함께

서울대 졸업 후 미국 램버스 대학 사회학, 미국 스카릿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미국 유학시절 이희호 여사

 

대한여자청년단, 여성문제연구회, YWCA연합회,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등의 단체에서 가족법 개정 운동, 축첩 정치인 반대 운동, 혼인신고 하기 등의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쳐 일했습니다.

여성지도자로서 최루탄 추방대회에 참가한 이희호 여사

특히 여성 문제, 아이들과 노인, 장애인 등 소외된 사람들이 겪는 빈곤과 인권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 결과 한국 인권을 위한 북미연합 ‘1984년도 인권상’과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올해의 탁월한 여성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수상했습니다.

2008년 발간 된 이희호 여사의 회고록 '동행'을 읽어보면

이희호 여사 자서전 동행

소녀 시절에는 "희희호호 웃는 이희호입니다."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재기 발랄한 소녀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일 하는 여성리더를 꿈 꿔 왔습니다.

그러던 중 1951년 부산 피난 시절, 30세에 평생의 동반자 김대중(당시 28세)이라는 청년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됩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첫 번째 부인인 차용애 여사가 1959년에 병으로 별세하게 되었고,
아무런 연락 없이 지내던 두 사람은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1961년 늦가을부터 자연스럽게 만남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962년 5월 10일, 서울 종로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이희호 여사 41세, 김대중 대통령 39세) 당시 이희호 여사의 집안과 주변에는 반대가 극심했으나, 청년 김대중의 성실성, 신념, 관용, 멋에 이끌렸으며,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혼식 때 가족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나는, 그의 의지와, 신념과, 관용과, 멋스러움을 사랑하고, 특히 남녘 땅 그의 고향 내음이 물씬 묻어나는 그 활짝 웃는 모습을 몹시 사랑하지만, 그 보다도, 내가 그의 동역자로서 나의 인생을 그에게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조국을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사랑, 우리의 사랑은 곧 조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희호 여사는 서울대를 나온 최고 엘리트였으나,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고졸에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낭인으로 지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듭되는 국회의원 선거 낙선, 1961년 선거에서는 당선되었으나 5.16으로 인해 감옥에 가야했던 꿈 많은 젊은 정치가일 뿐이었습니다.

가족사진(아기는 김홍걸, 맨 오른쪽은 김홍일)

게다가 이희호 여사는 초혼(당시 계훈제 라는 분과 결혼할 뻔 했으나 하지 않았음)이었으나,
김대중 대통령은 부인과의 사별로 중학생이던 두 아들(김홍일, 김홍업)도 기르고 있었으며,
홀어머니와 심장병에 걸린 시누이도 모셔야 했기에 주변 사람들의 반대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요.
결혼 후 두 사람은 3남인 김홍걸 씨를 얻게 되었습니다.

80년대 동교동 문패(김대중, 이희호, 김홍일)

이희호-김대중 부부는 남자가 집안의 주인이라고 생각되던 시절부터 집 앞에 부부의 이름을 문패로 나란히 붙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했던 부부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00년대에도 이어진 부부의 나란한 문패

 

1963년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된 후 당선사례(이희호 여사는 당시 김홍걸 씨 출산 2주 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남은 이희호 여사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오게 만들어 버립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인생은 망명, 납치, 구금, 연금의 연속이었고, 이로 인해 남편을 위한 석방 투쟁과 정치활동, 가장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서 음료를 건네는 이희호 여사
1976년 김대중 석방운동 중인 이희호여사, 김홍일 전 의원

심지어 1980년에는 남편인 김대중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그 시절 미국 백악관에 직접 구명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사형선고
김내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김대중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극적으로 석방되었고, 오랜 기간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1982년 미국 망명 당시
미국 망명 당시 김대중, 이희호 부부와 세 아들


이러한 시련들은 두 사람을 부부애를 넘어선 동지로서 살게 했습니다.

1985년 미국 망명 후 귀국해서
1987년 6월 항쟁 승리 후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며 눈물 흘리는 김대중
자유의 몸이 된 후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뒤 늦게 분향을 하고 있는 사진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에서 거듭 낙선(71년, 87년, 92년)을 경험하였고,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하느님은 나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이제 정계를 떠나려고 하오.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써주오."
구술을 받아 쓰다가 눈물 흘리는 이희호 여사의 손을 잡고 김대중 대통령은 "여보, 우리 1980년 사형선고 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웃을 일 아니오."라고 서로를 다독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92년 대선 패배 뒤 정계은퇴 기사

하지만 1996년 다시 정계 복귀를 선언 하였고,
마침내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은 15대 대통령에 당선(당시 이희호 여사 76세, 김대중 대통령 74세)되었고, 두 사람은 청와대에 들어가게 됩니다.

96년 정계복귀 선언 관련 기사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 당선
1998년 2월, 대통령 취임식에서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는 큰 꿈과 열정이 그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그는 늘 책을 읽고 메모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때부터 그랬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나는 이 비범한 남자의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름 평안한 노후를 보내시던 두 분에게 시련이 닥쳤는데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내 몸의 반이 무너진 심정"이라고 표현하시기도 했는데요,
그 이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서 2009년에 김대중 대통령도 서거하시게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이런 편지를 쓰셨다고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때 관에 함께 넣은 이희호 여사의 편지

"사랑하는 당신에게.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것 용서하며 아껴준 것 참 고맙습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 서거 이후에도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여러 활동을 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최근 노환으로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셨다고 합니다.

2018년 10월 손학규 대표 방문 때

다시 살펴보니 김대중 대통령도 그렇지만 이희호 여사도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정신적 동지이자 삶의 동반자가 없었다면 과연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2011년 김대중 광장 방문
가족들과 함께


두 분이 다시 만나신다면 아픔은 잊고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장남 고 김홍일 전 의원의 이야기를 읽으시려면 아래 글을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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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마을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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