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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5일) 오전, 문희상 국회의장이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 소속 바른미래당 오신환 의원의 사보임 신청을 허가했습니다.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가 사개특위 위원을 오신환 의원을 사임시키고, 채이배 의원으로 교체(보임)하는 내용의 사보임 신청서를 제출했고, 문희상 의장이 이를 검토해 허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사개특위 위원도 패스트트랙 지정 정족수인 11명 이상을 넘겨서 패스트트랙 안건들이 정식으로 상정되게 되겠네요.(패스트트랙 절차가 궁금하면 클릭하세요) 하지만 앞으로도 자유한국당의 반발이 심할 것으로 예상되기는 합니다.

오늘은 오신환 의원 대신에 사개특위에 들어가게 될 채이배 의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채이배 의원은 1975년 1월 2일(만44세)생으로, 채이배 의원의 고향은 전라북도 군산 출신입니다. 공인회계사 출신으로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는데, 1998년 대학시절 스승과 제자로 만난 장하성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수업을 계기로 시민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 교수가 이끈 참여연대와 경제개혁연구소에서 소액주주운동과 장하성펀드 등의 활동을 함께 했다. 공인회계사 시험 통과 이후에는 시민운동을 뛰어넘은 재벌개혁을 추진하고 싶어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채이배 의원이 정치인이 된 계기는 2012년 대선 당시 안철수 후보의 진심캠프에 들어가서 공약개별 관련 실무를 맡았고, 그러한 경험이 계기가 되어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채이배 의원의 지역구는 없으며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하였습니다. 아직 21대 총선 지역구는 정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네요.

비례대표 당선 후

재벌개혁이나 경제 개혁(공정경제)에 관심이 많아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안 발의, 일감 몰아주기 관행 근절을 위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하였고,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습니다. 또한 법률상 청년 범위를 34세까지 확대하는 중소기업인력법도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습니다.

당선 초기 20대 국회 초선 중 재벌저격수로 불린 3인 중 한 명

 

<P

 

채이배 의원은 오늘 사개특위 위원으로 보임 된 뒤 자유한국당 의원들에 의해 의원실에 감금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창문을 뜯어서라도 나갈 수 있도록 경찰과 소방관에게 요청하려고 합니다." 라고 창문으로 브리핑을 하기도 했습니다. 3번 걸친 시도 끝에 그는 오후 3시 경 6시간 만에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문으로 브리핑하는 채이배 의원

한편 오늘 권은희 의원도 사개특위 위원에서 사임된 후 임재훈 의원으로 보임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이 패스트 트랙의 운명이 정해지는 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될 지 궁금하네요.

학력 및 약력

인천 계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법학대학원 석사과정 수료-상법 전공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간사
삼일회계법인 금융본부 Senior Associate
이엔테크놀로지 재무팀장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연구위원
경제대혁연대(전 참여연대 경제개학센터) 정책위원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
서울시 교육청 청렴시민 감사관
씨알 배움터(공부방) 공동대표

<현재>
제20대 국회의원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
국회 청년미래특별위원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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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마을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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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3당(더불어민주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은 선거제도 개혁안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검·경 수사권 조정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에 올리기로 한 여야 4당 합의안을 만장일치로 추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바른미래당은 12 대 11, 1표 차이로 패스트트랙 합의안을 추인하기로 하여 이에 따른 갈등이 심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언주 의원은 이에 반발하여 즉각 탈당하기도 하였고, 바른미래당 분당의 조짐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공식적인 패스트트랙 지정까지 남은 절차는 25일까지 개별 개혁법안을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와 사법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에서 각각 패스트트랙 안건으로 지정해야 합니다.
 

패스트트랙 지정을 위해서는 정개특위와 사개특위에서 각각 재적위원 5분의 3 이상(11명 이상)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정개특위에서는 무난한 통과가 예상됩니다. 아래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개특위 위원 명단입니다.

자유한국당 소속 정개특위위원; 장제원, 김재원, 이종구, 임이자, 정유섭, 최교일(총 6명) 변동이 있습니다. 
민주평화당 소속 정개특위위원 천정배 의원 → 이용주 의원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아래 사진 파일이 최신 정개특위 위원 명단입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명단> - 선거법 담당


문제는 4당 합의안에 비판적인 오신환 바른미래당 의원이 포함된 사개특위입니다. 아래 명단을 보시면, 18명중 자유한국당 사개특위 위원 7명은 반대한다고 치면 자유한국당 외의 나머지 위원들이 모두 찬성해야 통과가 가능합니다.  아래는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사개특위 위원 명단입니다.
4월 25일 저녁 현재 상황: 김관영 원내대표가 오신환, 권은희 의원을 사임 시킴. 이어 채이배, 임재훈 의원을 임명(보임)함..

<국회 사법개혁 특별위원회(사개특위)명단> - 공수처법, 검경수사권조정법 담당, 주로 법조인 출신들이 많음.

바른미래당 권은희 의원은 찬성 의사를 밝혔으나, 현재 바른미래당 오신환 의원은 패스트트랙 안건 상정에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밝힌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현재 오신환 의원 사.보임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원내대표가 직권으로 오신환 의원을 사개특위에서 사임시키고, 다른 의원을 임명(보임)하려는 것입니다.
 
패스트트랙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남은 패스트트랙 일정을 보시려면 여기로 가시면 됩니다!(https://tanosiine.tistory.com/86))

오늘은 패스트트랙 안건 중 하나인 선거제도 개혁안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선거제도 개혁안>
 
선거제도 개혁안 내용: 국회의원 의석수는 현행 300석 유지(지역구 253석→225석, 비례대표 47석→75석), 50% 연동형 비례대표제

50% 연동형 비례대표제란? 

현재처럼 전국 단위 비례대표가 아니라, 유권자가 속한 권역을 대표하는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게 됩니다. 이처럼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이유는 우리 나라 선거 제도의 경우 51대 49의 비율로 선거 결과가 나오게 되면 49%를 얻은 후보를 선택한 표심이 전혀 선거 결과에 반영되지 못하던 문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패율제(석패율제란: 지역구 선거에서 아깝게 낙선한 후보를 비례대표로 구제하는 방식. 현행 선거법과 달리 지역구와 비례대표 중복 입후보를 허용)를 도입하여 유권자의 표심을 더 반영해 보려고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단, 특정 권역에서 지역구 의석의 30% 이상을 가져간 경우에는 석패율제를 통한 비례대표 구제를 금지하고 있습니다.(이 부분은 자한당에 불리하겠네요)

<50% 연동형 비례대표차 계산 예시>


ex) A당이 총선에서 지역구 30석, 전국 정당득표율 30%를 얻은 경우

(1차 배정-연동형 비례대표)
1. 전체 의석 300석 중 30%인 90석이 의석 배분 기준이 됨
2. 90석에서 지역구 당선 의석수를 뺌: 90석-30석(지역구에서 얻은 의석)=60석
3. 2에서 나온 60석의 절반을 비례대표 의석으로 보충: 60석의 50%인 30석을 연동형으로 비례대표 배정
(2차 배정-병립형 비례대표)
1. 각 당에서 1차 배정을 한 뒤 남은 의석수가 있을 것임.
2. 만약 1차에서 남은 의석수가 10석이라고 하면 남은 10석의 30%인 3석을 A당이 추가로 배정 받음.
A정당의 총 의석수 = 지역구 30석 + 비례대표 1차배정 30석 + 비례대표 2차 배정 3석 = 총 63석
아래는 제가 위의 방법에 따라 50%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지난 2016년 20대 총선에 대입해 보았습니다. 아래 예시에서는 권역별은 무시하고 그냥 전국 득표율을 기준으로 계산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거대 양당(새누리당 6석 손해, 더불어민주당 14석 손해)이 손해를 보고, 타 당은 이익인 구조네요.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지역구 선거가 국민의 대표성을 덜 띠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다음번에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내용, 검·경 수사권 조정 내용에 대해 써 보겠습니다.

 

아래는 바른미래당 국회의원 명단입니다. 검색 유입이 있어서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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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마을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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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7시, 김홍일 전 의원의 발인이 진행되었습니다. 김홍일 전 의원의 입관식은 22일 오후 치러졌으며, 오늘 오전 6시에는 함세웅 신부의 집전으로 장례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이후 오전 7시에 발인(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장례식장을 떠나 장지에 도착할 때까지 행하는 의식.). 장지는 광주 5·18 구묘역에 임시안장 될 예정입니다.

김홍일 전 의원은 5·18 민주유공자로 안장 대상이 맞지만 과거 나라종금 로비 사건에서 알선수재 혐의로 징역 2년·집행유예 3년형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렇기에 국가 보훈처관계자는 "안장 대상은 맞지만 알선수재 혐의로 현재 '안장심의대상자'가 됐다"며 "국립묘지 안장 대상 심의위원회(심의위원회)를 개최해서 안장 심의를 해야 되는 상황"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하여 우선 서울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오늘 오후 5·18 구묘역에 임시안장 될 예정입니다. 이후 안장 대상 심의위원회 결과에 따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정될 지 여부가 결정될 예정입니다.

정치권과 각계 인사들은 장례기간 동안 빈소를 찾아 고초를 겪으면서도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고인에 대한 존경과 애도를 표했습니다.

부인 김숙희 여사와 함께 장례식장에 조문한 이낙연 총리


이낙연 국무총리
는 김홍일 전 의원을 두고 “마음에 사랑이 많고 눈물이 많은 분”이라고 추억했으며, SNS에는 "위대한 아버님의 아들이어서 오히려 고난을 겪고 병을 얻어 그것으로 일찍 떠나셨다. 고통 없는 곳에서 안식하소서"라고 추모했습니다.

조국 민정수석은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 세대가 겪었던 ‘야만의 시대’를 다시 돌아본다. 시대는 변화했지만, 그 변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남겨진 상흔은 깊다. ‘독재’란 단어가 진정 무엇을 뜻하는 지도 돌아본다. 그리고 그 ‘독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 그 ‘독재’를 옹호·찬양했던 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린다. 현재와 같은 정치적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사라졌던가. 나는 '기억의 힘'을 믿는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 씨와 함께 장례식장을 찾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고인이 되신 분은 아버님이 야당 지도자이던 시절에 많은 활동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던 분이다. 그런 점들이 마음에 많이 떠올라서…"라며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그런 것이 없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곳에 가셔서 영면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문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민주주의를 위한 반독재 투쟁과정에서 고인이 당했던 수난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먹먹하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김홍일 의원의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라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조문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를 하시면서 정치 보복을 안하신 분이다. 우리도 서로 존중하는 정치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조문 온 사람이 할 말이 맞는지...)

(왼쪽부터)김홍업 전 의원, 김대중 전 대통령, 이희호 여사, 김홍일 전 의원, 김홍걸 씨


고인의 모친인 이희호 여사는 현재 김홍일 의원의 사망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간암 등이 악화된 상태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희호 여사는 현재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중입니다.

고인은 2001년 펴낸 에세이집 '나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는다'에서 “대통령 아들은 영광이 아니라 멍에요, 행복이라기보다는 불행”"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의 아들은 당사자 입장에선 명예라기보다는 멍에요, 행복쪽이라기보다는 불행쪽이지 않았나 싶다"이라고 토로한 바 있습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당시에는 공안당국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김 전 의원을 ‘빨갱이 새끼’로 부르며 “네가 김대중이 아들이냐. 너는 절대로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한다”며 심한 구타를 퍼부었다고 합니다. 김홍일 의원은 고문 도중 허위 자백을 할까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목을 다치기도 했고, 이 후유증으로 목 수술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때의 고문 후유증은 평생 김 전 의원을 괴롭혔고, 결국 파킨슨병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2003년 유영장학회 장학금 수여식에 참석한 김홍일 전 의원. 하지만 이후로는 건강이 악화되어 참석하지 못함

하지만 그는 고문당한 댓가로 받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보상금으로 유영장학회를 설립했습니다. 받은 1억2400만원을 종잣돈 삼아 지난 1999년 7월 '재단법인 유영장학회'를 설립했고, 김홍일 전 의원은 설립 때부터 현재까지 이사장을 맡아왔습니다. 장학회의 종잣돈은 7억원 가량까지 늘었으나, 김홍일 전 의원이 대외활동을 하지 못한 이후로는 안타깝게도 더 이상 잔고가 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김홍일 의원의 부인 윤혜라 여사가 매년 목포를 방문하여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음


유영장학회는 지난 2001년 2월 첫 장학금을 지급한 이후 올해로 19번째 장학금 수여식을 가졌으며, 매년 10~16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이후 김홍일 의원의 부인 윤혜라 여사가 매년 목포를 방문하여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이제 긴 영면의 길에 드신 김홍일 전 의원님의 명복을 빕니다.
고통 없는 곳에서 아버님을 만나서 행복하게 지내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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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마을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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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겨울, 영화 카모메 식당과 안경에 빠져 있는 내게 노조미 씨가 추천해 준 드라마..
두 영화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출연하기도 하는 드라마이다.
제목부터가 약간 심심한데, 제목과 내용의 상관관계는 잘 모르겠긴 하다..

해피니스 산차(ハピネス三茶)라는 하숙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과 안경을 재미있게 봤다면 이 드라마도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볼 때 한 번에 다 몰아서 다 봤는데,
1편은 인물 소개와 34살 미혼 여성인 하야카와가 집을 떠나서 해피니스 산차로 들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렇기에 약간 지루하기도 했지만, 2화부터는 본격적인 에피소드가 시작되었다.
내 이야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위로를 받기도 했다.

두 번 째 볼 때에는 밤마다 자기 전에 아껴가면서 하나씩 보고 자는데,
저용량으로 줄여서 폰으로 보는중.. 보다가 좋은 장면이 있으면 캡쳐도 하고..

나에게는 보석같은 드라마이다.
지금까지 나름 100개 가까운 일드를 본 것 같은데 그 중 최고인 것 같다..

(왼쪽 세 번째부터)교수, 에로만화가 키즈나, 신용금고 직원 하야카와, 하숙집 주인의 딸인 유카


그림에서 가운데 네 명이 이 하숙집에 사는 사람들이다.
왼쪽부터 교수, 에로 만화가인 키즈나, 신용금고 직원인 하야카와, 하숙집 주인장의 딸인 유카

하야카와 역을 맡은 고바야시 사토미는 역시나 자연스러운 연기!
유카 역을 맡은 이치카와 미카코는 안경에선 약간 시크하기도 하고 엉뚱하기도한 생물 교사 역할이었는데,
여기선 조금 소심하고 마음 여린 유카짱으로 나온다.

신용금고의 유일한 친구였던 바바짱이 금고의 돈을 횡령하고 사라진 후,
눈물을 흘리던 하야카와를 길에서 보고 손수건을 빌려줬던 교수..
소지하고 있는 돈의 전부가 83엔인 키즈나를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는 하야카와에게
그건 틀린 생각이라고, 여러가지 삶의 방식이 있어서 좋은 거라고 말하는 교수..
하야카와 같은 사람도 있어서 좋다고 말해 주는.. 거기서 나름의 위안을 얻는 하야카와..

하야카와에게 건네는 교수의 위로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하숙 생활..

안경에서도 그렇듯 자연스러운 수면 연기! 고바야시 사토미

예전에 이 하숙집에 살았던 아저씨 댄짱의 딸에게 차인 청년..
딸에게 주지 못한 케이크를 가지고 댄짱과 함께 해피니스 산차에 온 두 사람..
모모짱에게 주지 못한 생일 카드를 땅에 묻고 있는 청년에게 더 깊게 묻으라며 삽도 주고,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며 또다시 위로가 되어주는 교수..

나도 잊고 싶은 걸 다 잊어버리는 대신, 누군가가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날 저녁.. 주인 없는 케이크를 먹으며 이야기 하는 두 사람..
하야카와에게 감정이입..
나 역시도 에두프스퀘어를 통과하기 위해 발을 디딘 것이니 힘을 내야지!

여기까지가 2부.. 이후로도 할 수 있으려나...... 이렇게 쓰고는 8년간 쓰지 못 했다는...

이 글을 쓴 지 어느덧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나도 하야카와의 나이가 되어버렸다.
시간이 지난 지금, 이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된다면 느끼는 점은 또 전과 다르겠지?
하지만 하나는 확실할 것이다. 나에게 위로를 줄 것이라는 점.

여름이 오기 전에 다시 이 드라마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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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마을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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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은 1980년대에 무고한 민간인을 안기부 프락치로 몰아서 감금, 고문(물고문, 각목으로 구타하는 것 등)을 했던 1985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의 주모자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혐의로 1심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항소심(2심) 재판부인 서울 형사 지방 법원 항소 제5부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했고, 이 글을 계기로 세상에 그의 천재성을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머릿속에서 10시간 정도 정리한 글을, 얇은 종이 4장에 먹지 3장을 끼워 7장의 종이를 놓고 볼펜으로 퇴고 없이 꾹꾹 눌러 써서 총 3부의 항소이유서를 썼다고 합니다. 당시 담당 교도관이 "항소 이유서를 읽어 보니 학생들이 데모를 할 만 하더라."라고 말한 일화도 있다고 하네요. 당시 유시민 님의 누님이신 유시춘님이 항소이유서를 입수하여 법원 기자실에 가서 항소이유서를 뿌려서 짧막한 기사로 동아일보에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기사가 반향을 일으켰고, 그 결과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네크라소프의 말을 인용해서 마무리 한 이 글이 서서히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결과 복사본이 여기저기 전파되어 전국적으로 항소이유서가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훗날 백분토론 사회자 등을 거쳐 정치에 입문한 뒤(직접적인 정치 입문은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대선 민주당 후보일 때, 후단협 등 여러 세력에게 공격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직접 정치에 뛰어들게 되지요.) 정계를 은퇴하고, 유시민 님은 "지식소매상"(작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어용 지식인"(현 정부에 대해 친정부적 견해를 이야기 함, 현재 방송하는 유시민의 알릴레오가 그 예)의 길을 걷고 계시기도 하지요.

저는 고등학교 때에 항소이유서를 읽어 보겠다고 설치다가 실패한 적이 있는데요, 이번에도 큰 마음을 먹고 도전해 봐야겠네요. 읽게 되면 중요한 내용에 색깔 표시를 해 보겠습니다!(과연)


항소이유서

•본 적 :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망성동 163
•주 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 1동 한양아파트 11동 1107호
•성 명 : 유시민
•생년월일 : 1959년 7월 28일
•죄 명 :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요 지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 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 형량의 과중함을 애소(哀訴)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또한 본 피고인은 1심 판결에 어떠한 논란거리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본 피고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척도이지 인간이 만든 법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본 피고인으로서는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집단과 인간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현재의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수준의 반영인 동시에 미래의 그것을 결정하는 규정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폭행법이라 함) 위반 혐의로 형사소추 되어 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본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이 관련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떠한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상태의 반영이며, 또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규명함과 동시에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책임을 명백히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젊은 대학생들이 동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을 폭행하였다는 불행한 이 사건으로부터 ‘개똥이와 쇠똥이가 말똥이를 감금 폭행하였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다’는 식의 흔하디흔한 교훈밖에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항소이유서는,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그리고 거짓 선전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하는 청원서라 하겠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은 법률에 대해 논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 속에서 ‘책임’ ‘의무’ ‘과실’ 등등의 어휘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사용된 경우, 그 앞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무방합니다. 그리고 본 피고인이 특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단어나 문장에는 윗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우선 이 사건을 정의(定義)하고 나서 그것을 설명한 다음,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현 정권(본 피고인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비추어 제5공화국이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정부 대신에 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각자가 취한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이 글의 목적을 달성코자 합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 의해서는 ‘서울대 학원프락치사건’으로, 정권과 매스컴에 의해서는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으로 또는 간단히 ‘서울대 린치사건’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 명칭의 차이는 양자가 사건을 보는 시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본질 자체가 달라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본 피고인이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이는 ‘정권과 학원 간의 상호 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 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입니다.

‘정권과 학원 간의 상호 적대적 긴장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4월 민주혁명을 짓밟고 이 땅에 최초의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 5·16 군사쿠데타 이후 4반세기에 걸쳐 이어온 학생운동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혈사(血史)와 아울러 가열되어온 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사를 살펴보아야 할 터이지만, 이 글이 항소이유서임을 고려하여, 1964~65년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소위 6·3사태), 1974년의 민청학련 투쟁, 1979년 부산마산지역 반독재 민중투쟁 등을 위시한 무수한 투쟁이 있어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그치기로 하고, 현 정권의 핵심 부분이 견고히 형성되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 사회적 갈등, 정치적 비리, 문화적 타락은 모두가 지난날의 유신독재 아래에서 배태·발전하여 현 정권 하에서 더욱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들입니다. 현 정권은 유신독재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민주회복을 낙관하고 있던 온 국민의 희망을 군화발로 짓밟고, 5·17 폭거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국민이 낸 세금과 방위성금으로 무장한 ‘국민의 군대’를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피 묻은 권력입니다.

현 정권은 정식출범조차 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 정권이 말하는 ‘새시대’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독재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의 분칠을 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 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正義)’란 ‘소수군부세력의 강권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비효율적인’ 각종 민주제도(삼권분립, 정당, 노동조합, 자유언론, 자유로운 집회결사) 등을 폐기시키려 하는 사상적 경향을 우리는 파시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파시스트 국가의 말로가 온 인류를 재난에 빠뜨린 대규모 전쟁도발과 패배로 인한 붕괴였거나,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조차도 그 국민에게 심대한 정치적·경제적 파산을 강요한 채 권력 내부의 투쟁으로 자멸하는 길 뿐임을 금세기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은 전자의 대표적인 실례이며,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등장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등의 군사정권, 하루저녁에 무너져버린 유신체제 및 지금에야 현저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따위는 후자의 전형임에 분명합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지난 수년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운동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양심적 종교인,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언론인과 교수들, 그리고 민주제도의 회복을 갈망해 온 민주정치인들의 선봉에 섰던 젊은 대학인들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조건 아래라면 단 한 주일도 유지될 수 없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그토록 존귀한 우리 조국의 대리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 정권은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년 동안 무려 1,300여 명의 학생을 각종 죄목으로 구속하였고 1,400여 명을 제적시키는 한편 최소한 500명 이상을 강제징집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병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 구석구석에 감시초소를 세우고 사복형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그것도 모자라 교직원까지 시위진압대로 동원하는 미증유의 학원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이러한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으며, 1982년 기관원임을 자칭한 괴한에게 어린 여학생이 그것도 교정에서 강제추행을 당하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을 때조차, 최고위 치안당국자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하여 “교내에 경찰을 상주시킨 일이 없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밝혀내 발본색원 하겠다”고 태연하게 답변하였을 정도입니다.

현재 학원가를 풍미하고 있는 정권, 특히 경찰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이와 같은 정권의 학원탄압 및 권력층의 상습적인 거짓말이 초래한 유해한 결과들 중의 한 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양떼를 잃어버리는 작은 사건을 낳는 데 그쳤지만, 주 유왕(周 幽王)이 미녀 포사(褒似)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올린 일은 중국 대륙 전체를 이후 500여 년에 걸친 대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의 외침을 외면한 마을사람들이나 오랑캐에게 유린당하기까지 주(周)왕실을 내버려 둔 제후들을 어리석다 말하지 않습니다. 정권의 주장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불신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더욱이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학원탄압은 전국 각 대학에서 목숨을 건 저항을 유발하였고, 그 결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당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만도 고 김태훈, 황정하, 한희철 등 셋이나 되는 젊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83년 12월의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주전선(主戰線)이 교문으로 이동하였다는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특히 지난해 9월 총학생회 부활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었던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 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 간의 적대감 또한 전례 없이 고조된 바 있습니다. 즉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학원과 정권 사이의 적대적 긴장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수명의 가짜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 이들의 의심을 받게 된 경위 및 사건경과는 이미 밝혀진 바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에서 가짜학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정보원인지 그 여부는 극히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임에 분명하지만 사건의 법률적·윤리적 측면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연행·감금·조사 또는 폭행한 것은 결코 정보원이나 단순한 가짜학생이 아닌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이었으므로, 조사 결과 그들이 정보원이었다고 해서 폭행까지도 정당할 수는 없으며, 또 아니라고 해서 학생들의 일체의 행위가 모두 부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이 문제에 대해 재론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보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 의해서 입니다.

갖가지 목적으로 학생처럼 위장하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수많은 가짜 학생들, 이들은 소위 대형화·종합화된 오늘날의 대학에서, 졸업정원제·상대평가제 등 대학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제 한 몸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집단양성소로 전락시키기 위해 독재정권이 고안해 낸 각종 제도가 야기한 바, 대학인의 원자화·고립화 등 비인간화 현상을 틈타 캠퍼스에 기생하는 반사회적 인간집단으로서, 교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절도·사기·추행·학원사찰의 보조활동(손형구 경우처럼) 등과 복합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으로 해서 대학인 상호간에 광범위한 불신감을 조성하고 대학의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파괴하는 암적 존재입니다.

현 정권은 이들이 대학인의 일체감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내에 사복경찰을 상주시킴으로써 야기된 숱한 문제들마저 이들에게 책임 전가시킬 수 있다는(여학생 추행사건 때처럼) 잇점 때문에 가짜학생의 범람현상을 방관 또는 조장하여 온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이들에 대해 평소 품고 있는 혐오감이 어떠한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들 가짜들이, 혹은 복학생들의 소규모 집회석상에서, 혹은 도서실에서, 법과대학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버젓이 학생행세를 하면서 학생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하다가 탄로 났을 경우, 법이 무서워서 이를 묵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상호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로 그들을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수사기관에,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의 신분조사를 의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학의 교정은 개방된 장소이므로 은밀한 사찰행위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수백 수천의 정·사복 경찰이 교정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할지라도 이는 전혀 비합법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러한 부도덕한 학원 탄압행위에 대한 학생들의 여하한 실질적 저항행위도, 비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이지만, 현행 법률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 법과 양심 모두를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물론 대학사회도 포함하여, 당면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논거에 입각한 것입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어느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지난해 9월, 10일 간에 걸친 일련의 사건은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체로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 사건은 서울대생들의 민한당사 농성사건, 주요 학생회 간부들의 제적·구속, ‘학생운동의 폭력화’에 대한 정권과 매스컴의 대공세, 서울대 시험거부 투쟁과 대규모 경찰투입 등 심각한 충격파를 몰고 왔으며, 공소 사실을 거의 전면 부인하는 피고들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단락된 바 있습니다.

사건 종료 다음날인 9월 28일, 전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백태웅과 뒤늦게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을 겸직한 사회대 학생회장 오재영군 등이 지도한 민한당사 농성은 자연발생적·비조직적으로 일어난 이 사건을 부도덕한 학원사찰 및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조직적 투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가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법률적·윤리적 과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학원사찰의 존재라는 별개의 정치적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 투쟁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정당한 행위였다고 본 피고인은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날인 9월 29일 저녁, 학교 당국은 이정우·백기영·백태웅·오재영 등 4명의 총학생회 주요간부를 전격적으로 제명 처분하였으며, 본 피고인은 9월 30일 하오 경찰에 영장 없이 강제연행 당한 후 며칠간의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습니다.

본 피고인이 가장 먼저 연행당한 것은 미리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피하지 않은 것은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도망칠 만큼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경찰·검찰에서의 조사 및 법정진술시 기억력의 한계로 인한 사소한 착오 이외에 여하한 수정·번복도 한 바 없었으며 오직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입니다.

어쨌든 서울시경 국장은 10월 4일 소위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의 수사결과를 도하 각 신문·TV·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4명의 외부인을 감금·폭행한 이 일련의 사건이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합의 아래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0월 4일 이전에 경찰에 연행된 몇몇 학생들 중(본 피고인을 포함) 어느 누구도 이 발표를 뒷받침해 줄 만한 진술을 한 바 없으며, 이후에 작성된 구속영장·공소장 및 관련학생들의 신문조서들이 모두 이 발표의 기본선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임은, 만일 이 모든 서류를 날짜별로 검토해 본다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10월 4일의 경찰발표문의 본질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견강부회·침소봉대·날조왜곡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폭력지향적인 파괴활동으로 중상모략 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은 물론 현 정권 자체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은폐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비조직적·우발적으로가 아니라, 학생단체의 대표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몇몇 관련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전체를 비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며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했는가에 관계없이 선전을 위한 가장 손쉬운 희생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법은 지난 수십 년간 대를 이어온 독재정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구사해 온 낡은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 정권은 막 출범한 서울대 학생회의 주요 간부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60만 대군을 동원해도 때려 부술 수 없는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치 자신이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된 듯한 자기만족조차 조금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검찰 역시 사실을 밝혀내는 일보다는 경찰의 발표를 뒷받침하기에만 급급하여 대동소이한 내용의 공소를 제기하고, 그것에만 집착하여 왔습니다. 사건 발생 후 1개월도 더 지난 작년 11월, 관악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김도형·손택만 군 등 무고한 학생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공소사실과 일치하는 허위자백을, 형사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짜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즉 경찰은 본 피고인들이 ‘폭행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를 바로 그 ‘폭행법’을 위반하여 관련된 학생들을 고문함으로써 짜낸 것입니다. 그 짜내어진 허위자백이 증거로 채택된다는 사실을 못 본 체 하더라도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혀 정당한 윤리적 기초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심인으로서는 복종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었던 지난날의 긴급조치나 현행 ‘집시법’과 달리 이 ‘폭행법’은 지켜져야 하며, 또 지켜질 수 있는 법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인은 현 정권에 대한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이 법 앞에서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폭행·고문하는 각 대학 앞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그 때문에 ‘폭행법’ 위반으로 형사소추 당했다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19일,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 주최한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는 길에, 그녀 자신 제적학생이면서 역시 고려대학교 제적학생인 서원기씨의 부인 이경은씨가 동대문 경찰서 형사대의 발길질에 6개월이나 된 태아를 사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부는 이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음이 누구의 눈에나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고소장을 접수하고서도, 검찰은 수사조차 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 역시 여러 차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폭행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 법의 보호를 요청할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협박 또는 폭행을 가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 피고인은 폭력범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이 굳이 지난 일을 이렇듯이 들추어냄은 오직,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바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의 존재를 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역시 앞에서 밝힌 바 현 정권의 정치적 음모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검찰이 주장하는 바 공소사실의 대부분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찰이 날조한 사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편에 있어서는 정권과 매스컴이 공모하여 널리 유포시킨 일방적인 편견의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고문수사를 통해 짜낸 관련 학생들의 허위자백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공허한 내용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 학생들의 과실과 본 피고인 자신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렇듯 정권의 부도덕을 소리 높이 성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짜학생에 대한 연행·조사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손치더라도, 이들에게 가한 폭행까지를 정당화 할 의향은 없습니다. 조사를 위한 감금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하며 폭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폭력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본질상 다 폭력의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만, 무력한 개인에게 다중이 가한 폭행은 비록 그것이 경찰에 대한 이유 있는 적대감의 발로인 동시에 그들이 상습적으로 학생들에게 가해 온 고문을 흉내 낸 것이라 할지라도 학생운동의 비폭력주의에서 명백히 이탈한 행위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폭행을 가한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책임을 감당하지 않은 것 또한 비록 그것을 어렵게 만든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사정이 개재됐다 손 치더라도, 학생들이 가진 윤리적 결함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 폭행과 절대로 무관하며 사건 전체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여 틀림이 없을 총학생회장 이정우 군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아 항소조차 포기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행위가, 그 누구도 선뜻 폭행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윤리의 공백상태를 어느 정도는 메워 주었다고 본 피고인은 확신합니다.

본 피고인은 역시 언행이나 조사를 지시한 사실이 없지만(지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만일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직접 그들을 연행·조사하였을 것입니다(그것이 위법임은 물론 잘 알지만).

본 피고인은 복학생 협의회의 사실상의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비폭력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소극적 의무에 부가하여 학생운동의 전체수준에서도 이 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적극적 의무 또한 완수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9월 26일 밤 전기동, 정용범 양인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신현, 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도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쨌든 상당한 정도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떠맡기 위해 이정우 군처럼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너무나도 명백한 정권의 음모의 노리개가 될 가능성 때문에 본 피고인은 사실과 다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결코 시인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고, 또 그런 자세로 법정투쟁에 임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본 피고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공소사실을 기정사실화시키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요구하는 그것과는 성질상 판이한 것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 피고인은 이 사건의 재판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며,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진보의 계기로 삼으려면 사법부가 본연의 윤리적 의무를 완수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 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명의 가짜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지난 수년 간 현 정권이 보여준 갖가지 부도덕한 행위들―학원 내에 경찰을 수백 명씩이나 상주시키면서도 온 국민에게 거짓증언을 한 치안당국자의 행위, 소위 자율화조치라고 하는 아름다운 간판 위에서 음성적인 학원사찰을 계속해 온(이에 관해서는 법정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수사기관의 행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사건조차 서슴지 않고 날조·왜곡한 행위 등―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위 중 비합법적인 부분만을 문제 삼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법부 자체는 이처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 난입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 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 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갖가지 반사회적 목적을 위해 교정을 배회하고 있을 수많은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안전보장 선언’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결코 학생들의 행위 전부에 대한 무죄선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부도덕한 자에 대한 도덕적 경고와 아울러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하며, 허위선전에 파묻힌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사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의 도덕적 향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사법부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正義)를 세우며, 또 그 정의가 강자(强者)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1심의 재판 과정에서 매장당한 진실이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 피고인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쉽게 허물어버리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현재의 불신과 적대감의 장벽 위에 분노의 가시넝쿨이 또 더하여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유사한 사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5년 간 현 정권에 반대했다 하여 온갖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1,500여 명의 양심수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성한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야수적인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역시 그만큼 많은 분들이 전대미문의 악법 ‘긴급조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보도 또한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던 변호사도 그 변론 때문에 구속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긴급조치가 정의로운 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리고 그때 투옥되신 분들이 ‘반사회적 불순분자’ 또는 ‘이적행위자’였다고 말하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분들을 ‘죄수’로 만든 법정은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고 하며, 그분들을 기소하고 그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검찰과 법관들 역시 ‘정의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곳에 민주주의가 살해당하면서 흘린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은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성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의에 관심을 갖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현명한 재판관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정의가 설 토대를 건설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본 피고인은 1심판결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본 피고인은 판결문을 받아보았을 때 참으로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려 7회에 걸쳐 진행된 심리과정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피고인이 그토록 진지하게 임했던 재판의 전 과정이 단지 예정된 판결을 그럴듯하게 장식해 주기 위해 치러진 무가치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판결이유’의 ‘범죄사실’ 제1항 중 “······임신현이·····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피고인 유시민은 성명불상 학생들에게 위 임신현의 신분을 확인·조사토록 하고···”라는 부분은 형식논리상으로조차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본 피고인에게 지시를 받은 학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어떻게 그가 성명불상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본 피고인이 한 번도 이를 시인한 바 없으며, 백수택 군 등 여러 학생들의 진술은 물론이요, 임신현 자신의 법정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할지라도, 본 피고인이 임신현이 연행 구타되던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본 피고인이 성명불상의 누군가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렸다는 일이 어찌 증명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본 피고인은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범죄사실’ 제2항 중 “·····위 김도인은 피고인 백태웅과 피고인 유시민 앞에서····· 구타하여 동인(손형구를 말함)에게 전치 3주간의·····다발성 좌상을 가한·····” 부분 역시, “백태웅과 유시민에게 조사받는 동안 한 번도 폭행당한 일이 없다”고 한 손형구 자신의 법정진술에조차 모순됩니다.

그리고 ‘범죄사실’ 제3항 중 “피고인 유시민은·····동일(9월 26일을 말함) 21:00경부터 익일 01:00까지 피고인 윤호중, 같은 오재영 및 백기영, 남승우, 오승중, 안승윤 등과 같이·····(정용범을)·····계속 조사하기로 결의하고·····” 및 ‘범죄사실’ 제4항 중 이와 유사한 대목 역시, 본 피고인이 당시 진행 중이던 총학생회장 선거관리 및 학생회칙의 문제점에 관해 선거관리 위원들과 장시간에 걸쳐 논의한 사실을 왜곡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는 오승중, 김도형 등의 진술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진 일입니다.

이 몇 가지 예는 특히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며, 판결문 전체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는 사건 전체가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지휘 아래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기실 판결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침소봉대·견강부회·날조왜곡된 지난해 10월 4일 경찰발표문을 원전(原典)으로 삼아 구속영장·공소장을 거쳐 토씨 하나 바꾸어지지 않은 그대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1심판결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향상에 기여해야 할 사법부의 사회적 의무를 송두리째 방기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이 이처럼 1심판결의 부당성을 구태여 지적한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당한 이유에 의한 유죄선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재 마치 '폭력 과격 학생'의 본보기처럼 되어 버린 본 피고인은 이 항소이유서의 맺음말을 대신하여 자신을 위한 몇 마디의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본 피고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격정적이거나 또는 잘난 체 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하물며 빨간 물이 들어 있거나 폭력을 숭배하는 젊은이는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으며 늘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말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라’,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지금은 그분들의 성함조차 기억할 수 없는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말씀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오히려 조금은 우직한 편에 속하는 젊은이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변명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곧 민주주의의 재생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 전체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을 등 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 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 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 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 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 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하신 사회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열여섯 꽃같은 처녀가 매 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 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 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 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학생임을 학교 당국 및 수사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 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 3월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 5월 17일,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본부 특수수사관들로부터 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회의 공소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 며칠 후에 신체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 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 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학적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 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 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면서 대학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대 불과 두 달 앞둔 1983년 3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녹화사업' 또는 ‘관제 프락치공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이 수백 특변자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던 본 피고인은 보안부대의 공포감을 이겨 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 탄압에 대한 공포감에 짓눌려 지내던 본 피고인에게 삶과 투쟁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되살려준 것은 본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징집당한 학우들 중 6명이 녹화사업과 관련하여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동지를 팔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순결한 양심의 선포 앞에서 본 피고인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순결한 넋에 대한 모욕인 탓입니다.

그래서 1983년 12월의 제적학생 복교조치를 계기로 본 피고인은 벗들과 함께 ‘제적 학생 복교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야수적인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의 폐지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복교하지 않은 채 투쟁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정권은 녹화사업의 존재, 아니, 강제징집의 존재마저 부인하면서 우리에게 ‘복교를 도외시한 채 정부의 은전을 정치적 선동의 재료로 이용하는 극소수 좌경 과격 제적학생들’이라는 참으로 희귀한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어용 언론을 동원한 대규모 선전 공세를 펼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복학하게 되었을 때 본 피고인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복학생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복학한 지 보름 만에 이 사건으로 다시금 제적학생 겸 구속학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 피고인의 이름은 ‘폭력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은 이렇게 하여 5.17폭거 이후 두 번씩이나 제적당한 최초의, 그리고 이른바 자율화 조치 이후 최초로 구속 기소되어, 그것도 ‘폭행법’의 위반으로 유죄선고를 받은 ‘폭력과격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몸은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 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여, 민주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운동이야말로 가위 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민중항쟁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 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 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2]

1985년 5월 27일

유 시 민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 제5부 재판장님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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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마을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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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 오후 김홍일 전 의원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80년대에 독재를 일삼으며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사람도 90이 넘어서도 건강하게 사는데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다가 가셨네요. 너무 안타깝고 분한 마음도 듭니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서울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김홍일 전 의원은 이날 오후 4시 8분경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자택 안방에서 쓰러진 채 자택 관리인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급대가 김 전 의원에게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한 뒤 인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오후 5시 4분 숨을 거두셨다고 합니다. 향년 71세.

김홍일 의원은 1948년 출생으로, 경희대학교 정치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버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도와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을 하였습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아 파킨스씨 병을 얻게 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김홍일 의원은 이 때 보안사로 연행돼 모진 고문을 당했고, 10일 동안 계속된 고문을 견딜 수 없어 자해를 기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에 이상이 생겨 목디스크 수술을 받았고, 재선 의원 시절 파킨슨병까지 얻어 보행에 상당한 불편을 겪어 휠체어에 앉아 의원직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2005년 김홍일 전 의원

1996년 15대 국회의원(새정치국민회의, 전남 목포)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이어 2000년 16대 국회의원(새천년 민주당, 전남 목포)에 당선되었습니다.
2004년 17대(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총선 때는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분당할 때 새천년민주당 당적을 유지하여 비례대표로 당선돼 3선 의원을 지냈습니다.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란?
:1980년 신군부세력(전두환 정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북한의 사주를 받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킨 주동자로 지목하여, 재야인사 20여 명과 함께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 이 사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

그러나 이후 정부 결정으로 무기징역으로, 또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음. 2년 7개월간의 수감 끝에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김대중 구명운동의 영향으로 1982년 12월, 병원으로 이송된 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떠나게 되었음.
이후 2003년 재심을 청구하여 2004년 2월 무죄 판결을 받음.


하지만 나라종합금융으로부터 인사청탁과 함께 1억5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2006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추징금 1억5000만 원의 확정판결을 받고 2006년 의원직을 상실했습니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포스터

그는 90년대 들어 파킨슨씨 병(파킨슨병: 뇌에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가 원인 모르게 서서히 사라져 가는 질환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점점 불편해 지다가 병이 진행되면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 짐)이 발병해 실생활에서 행동 뿐 아니라 언어에도 상당한 장애를 겪어왔습니다. 그래서 의원직 상실 이후 대외 활동이 거의 없다가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 때에 몰라보게 수척해 진 모습으로 장례식에 참석하여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하기도 했지요.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 때 김홍일 의원
2010년, 김홍일 의원


김홍일 전 의원이 파킨스씨 병에 걸린 원인을 주변에서는 '80년 내란음모사건'등 독재시절의 고문후유증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김 전 의원의 경우 공군장교로 군복무를 마칠 만큼 젊은 시절에는 건강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로인해 김 전 대통령도 평소 큰아들에 대해 가슴 가득한 연민을 품고 있었다고 전해 졌습니다. 큰아들이 자신을 돕다가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씨 병'이 생겼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왼쪽부터)김홍일 전 의원, 김대중 전 대통령,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

김홍일 전 의원의 가족으로는 부인 윤혜라 여사, 세 딸 지영, 정화, 화영 씨,
어머니 이희호 여사, 남동생 김홍업 전 의원, 김홍걸 씨가 있습니다.

현재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빈소가 차려졌으며, 김홍일 전 의원의 발인은 4월 23일 오전 7시라고 합니다. 
고인이 영면에 드실 장지는 5.18 국립묘지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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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닷마을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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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 추가)
오늘 가수 휘성씨가 자신의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wheesungnym/)에 심경을 고백했습니다.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아버님의 납골당에 다녀온 것 같은데요, 휘성 씨는 작년 5월에 부친상을 당했습니다.
오늘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휘성 씨가 어서 마음을 잘 추스리고 다시 밝은 모습으로 활동하셨으면 좋겠네요.

난 아빠앞에 이렇게 떳떳해요
불쌍한이들의 손가락질 따위
신경안써요 아빠 저보다 저 마음이 고장난 이들을 위해 축복을 주세요 난 부끄럼없어요
이제 누가 믿든 말든 상관없어요 난 내 할일만 하고
가족만 보고 고개 숙이지 않고 걸어가요 아빠처럼 ..
또 올게요

휘성 인스타그램
휘성 인스타그램

 


아래 내용은 휘성씨가 공개한 에이미씨와의 통화 녹취록 전문입니다.

오늘 가수 휘성씨의 소속사인 리얼슬로우컴퍼니에서 에이미씨의 폭로 후 에이미와 휘성 씨와의 통화 내용 녹취록을 공개했네요. 녹취록은 제가 듣고 직접 쓴 것이라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최대한 그대로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휘성씨는 정말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느낌이겠어요.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빌며 휘성씨의 글 전문과 녹취록전문을 올려봅니다.

<휘성씨의 인스타그램 글>

휘성입니다.


4월 17일 밤 에이미씨에게 연락이 왔고, 통화 녹음본 공개는 에이미씨와 합의 하에 진행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공개를 결심하기까지 고민이 정말 많았습니다. 에이미씨 역시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기에, 공개하는 것에 대해 수도 없이 망설였습니다.하지만 저를 둘러싼 의혹 해소 및 사실관계에 대한 팬 여러분들의 객관적 인지를 위해서는 녹취록을 공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에이미씨는 저에게 언론 매체를 통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밝혔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관계에 관한 확인 없이, 감정만 앞선 성급한 내용으로 사과문이 만들어져 논란이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에이미씨에게SNS의 허위 사실 게시물을 내려달라고 했고, 본인을 인터뷰했던 기자분께 사실을 전달해달라고 했습니다.
에이미씨는 이를 받아들였으며, 추가적으로 저는 성급한 행동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녹취록에서 현재 쟁점이 되는 내용과 관계가 없는 부분들은 부득이하게 편집하였습니다.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이후 에이미씨의 사과는 당사자의 자유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사과를 한다면, 진심이 담긴 내용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1. 대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에이미씨가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고, 심신이 미약해 보이는 정황이 있는 상황에 제가 섣불리 나설 수 없었습니다.
사실에 근거한 입장문은 이미 사건 발생 당일 작성이 끝난 상태였고, 반박 증거 자료 역시 제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2. 법적 대응에 대한 부분
아직까지는 가수 휘성만으로 매출을 기대하고 있는 소규모 법인 기업으로서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는바, 이미 법적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는 허위사실 유포 및 인신공격을 한 언론과 악플러들에 대한 고소장이 작성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 만큼은 총력을 기울여 강력처벌로 이어지게 될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3. 합동 콘서트 취소
모든 법적 조치가 끝나 정리가 된 일을 다시 쟁점화한 것은 제가 아니지만, 현재 상황에서 원만한 공연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모두의 입장을 받아들여 ,케이윌 휘성의 합동콘서트를 취소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현재 이 부분이 가장 아쉽습니다. 이 모든사태가 정리가 되고 나서 훨씬 완성도 높은 브로맨쇼를 개최할 수 있도록 공연기획사측과 협의할 계획입니다.
이찌되었든 제가 끼어있는 상황때문에 피해를 입은 스프링엔터테인먼트와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친구 케이윌군에게 깊이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4.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
이 사건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모두가 피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불 난 듯이 번졌을 때, 어느 누군가에게는 실질적 피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상황을 이해하기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시선이 아닌, 중립적인 입장에서 온전한 사실만을 바라봐 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현 상황이 조속히 마무리되길 바라며 저를 응원해오셨던 분들께 심려끼쳐드린점 죄송합니다. *****합동콘서트 관련해서 정정사항이 있으니 다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부분만큼은 제 오해로 인하여 잘못된 사실을 적었습니다 현재 기재된 사실이 맞습니다.

영상은 이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약 7분인데 글로 보실 분은 아래의 글을 읽으시면 됩니다.

 

<<통화 녹취록 전문>>

에이미: 휘성아, 나 네가 나 진짜 용기 갖고 전화한거야. 나,
휘성: 근데 너의 일관적인 진술은 하나더라. 딱 하나 있더라.
에이미: x
휘성: 그래, 그래서 나한테 전화했어.

휘성: 아니, 나는 내가 그런 말을 할 일도 없고, 이유도 없고. 그리고 그런 모의를 하는, 살인? 살해협박 모의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 강간모의라고 하고. 말이 계속 바뀌니까. 그러니까 에이미가 한 말이에요? 형이 들려줬다 그러던데?

x: 내가 왜 걔 왜 들려줘 그런거를?

휘성:
아니 있냐고요 형? 내가 진짜 그런 말을 했냐고요?

x:
니가 했을 리도 없고, 너는 에이미랑 제일 친했었고, 내가 에이미 욕했을때

휘성:
난리 났었었지 내가.
x: 네가 화가 나갖고 나랑 싸웠지.

휘성: 내가 진짜 그런얘기, 내가 형한테 그런 얘기 언급이라도 했어요? 내가 형이 에미한테 못됐게 굴 때마다 내가 형이랑 싸운 적은 있어도 내가 한 번 이라도, 내가 에이미 입 막아달라고 그렇게 해 달라고 사주한 적 있어요? 형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제발 얘기 좀 해줘요. 나 빨리 처벌 받고 편해지고 싶다고.

에이미: 그러니까 뭐래?

휘성:
결코 그런 일 없고 자기가 법정까지 나서겠대. 나 그 녹음, 녹취 받았어. 받고, 이제 속기 또 들어갈거야. 나 이제 어떻게 해야되니? 나 이제 어떻게 살아야 돼?

휘성: 왜 그런거야?
에이미: 나, 너 얘기 오늘 다 들으니까 내가 쓰레기 같이 느껴져
휘성: 아니 난 지금 다 사람들한테 이렇게 돼버렸잖아
에이미: 내가 그거 다 돌려놓을게 내가 잘못했다고
휘성: 너가 잘못했다고 해도 아무도 안 믿어 이제
에이미: 아니, 믿어
휘성: 아니 아무도 안 믿을거야 진짜로. 나 오늘 결국에. 이 xx콘서트까지 취소되면서 모든 계약들 다 무너지게 됐어. 나 이제 무슨 일 하고 살아야 되니? 나 노래라도 할 수 있을까?
에이미: 휘성아 미안, 나 용서해 줘.
휘성: 네가 날 용서해야 된다며?
에이미: 아니야. 
휘성: 네가 날 용서해야 된다며? 이제 날 아무도 안 믿는데, 난 어떻게 살아야 되니?
에이미: 아니야. 돌려놓을게. 내가 욕 더 많이 먹고 돌려놓을게 확실히
휘성: 너는 왜 그렇게 너만 봐? 왜 그렇게 너만 보니 나는 이러면서도 나는 내가 가장..
에이미: 나는 너가 대단해 보였고, 나는 너한테 솔직히 말해서 자격지심같은 것도 있었고..
휘성: 그게 왜 내가 돼야 돼! 도대체 왜 내가 돼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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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스포츠의 전설 임요환 씨를 아시나요? 오늘 라디오스타 예고에서 그의 상금을 공개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궁금해서 미리 찾아봤습니다. 프로게이머 선수였던 그는 2013년 프로 포커 플레이어로 전향했고 각종 포커대회에서 우승하며 현재까지 누적 상금 약 4억 5천만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프로게이머 시절

그는 “다른 선수들에게 포커에 관한 비전을 듣고 포커 선수 전향을 결심했다. 포커는 피지컬이 필요 없고 정신력으로 들어가 머리만 잘 쓰면 된다는 걸 알았다”고 이야기 하며 포커 플레이어로 전향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포커 입문 1~4년차 까지는 번 돈 대부분을 참가비나 체류비용으로 쓰며 버텼고, 5년차가 된 2018년부터 수익이 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아시아권 포커 대회(APT)에서 사이드 이벤트(한 대회 내의 작은 규모 경기) 우승 8회, 메인 이벤트(대회 내 큰 규모 경기) 우승 2회, 준우승 2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임요환 씨는 2017년 11월, 아시아 선수 최초로 월드 포커 투어(WPT)에 초청되기도 하였습니다.

아시아 선수 최초로 WPT에 참가한 임요환

2018년 7월에는 아시아 포커 투어(APT) 노 리미트 홀덤 이벤트에서 1위로 약 453만원의 상금을 받았으며,

2018년 9월
에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 포커 투어(APT)에서 노 리미트 홀덤 이벤트(2330만원), 챔피언십 이벤트(5587만원)에서 모두 우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2018년 12월에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 포커 투어(APT) 필리핀 메인 이벤트 파이널에서 준우승(4000만원), 챔피언십 2018 파이널에서 5위(1540만원)를 기록하여 추가로 상금을 획득하기도 하였습니다.

2019년 1월에 베트남에서 열린아시아 포커 투어(APT) 챔피언십 대회에서도 우승(9917만원)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아내 김가연씨가 2019년 시작이 좋다며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리기도 하였지요.

김가연씨 인스타그램, APT 베트남 우승

이렇게 해서 포커 플레이후 전향 후 임요환씨의 포커대회 총 누적상금은 약 4억 5천만원 정도라고 하고, 2018년 누적 상금은 1억 8500만원이라고 합니다. 2019년 첫 대회에서만 거의 1억원의 상금을 획득하였으니 정말 시작이 좋네요.

쓰는 김에 임요환 씨의 가족관계도 써 보겠습니다.
임요환 씨는 오랜 연애 끝에 지난 2011년 탤런트 김가연씨와 혼인신고를 했고, 결혼식은 2016년에 했습니다. 임요환, 김가연 씨의 나이 차이는 8살입니다. 임요환 씨는 1980년생으로 40세, 김가연씨는 1972년생으로 48세시네요. 김가연씨는 임요환씨와의 재혼 전 결혼에서 낳은 첫째 딸 임서령 양이 있고, 2015년 8월 임요환 씨와의 사이에서 둘째 딸 임서령 양을 얻었습니다. 두 딸이 참 많이 닮은 것 같은 느낌적 느낌입니다. 

김가연, 임하령, 임서령 양

앞으로도 임요환 씨의 좋은 소식들을 기대합니다!

오늘 라디오스타는 "우리집에 연예인이 산다" 특집으로 강주은, 정경미, 권다현, 임요환 씨가 출연한다고 합니다.
밤 11시 10분부터 mbc에서 방송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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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들은 뉴스. 바로 매년 120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프랑스 파리의 관광명소인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소식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파리 여행에 갔을 때 노트르담 대성당을 가 봤었는데요, 가 본 곳이라 그런지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4월 15일 오후 6시 50분 쯤에 첨탑 보수공사를 위해 만든 비계 쪽에서 시작된 불은 새벽 3시 30분 쯤 주불을 진화하였으며, 이날 오전 9시 정도까지 잔불 정리작업을 완료하였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제는 소방관들과 문화재 전문가들이 건물 내부로 진입해 미수거 문화유산을 꺼내오는 작업을 먼저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원인은 보수 공사를 위해 설치한 비계(건축공사 때에 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하는 설치물)에서 화재가 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비계들이 불쏘시개가 되어 더욱 화재 진압이 어렵다고 하네요. 또한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의 중요 문화재이며 세계문화유산이기 때문에 물을 쏴서 불을 끄게 될 경우 목조건물인 성당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해 조심스럽게 화재 진압을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첨탑이 무너진 노트르담 대성당의 현재 상태


그래도 다행히 첨탑 부분만 불에 타고, 아래 몸통 부분은 지켰다고 하네요. 하지만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첨탑의 의미는 상상 이상으로 큽니다. 첨탑은 인간이 신으로 향하는 통로라고 여겨 왔기에 더욱 소중한 부분이라고 하네요. 첨탑이 무너지는 그 순간, 사람들은 다들 탄식을 하며 첨탑이 무너지는 장면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노트르담 성당을 짓는데 200여년이 걸렸던 만큼, 불에 타 버린 성당을 재건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리라 예상한다고 합니다.

노트르담 대성당 첨탑이 무너지는 순간

다행히 노트르담의 가장 귀중한 보물인 '가시면류관'(황금으로 만들어진 나뭇가지와 갈댓잎을 원형으로 엮은 것으로 국왕의 왕관보다 더 가치있는 유물로 알려짐)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서 지켰다고 합니다. 

가시면류관

또한 노트르담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알려진 성당의 서쪽과 남쪽, 북쪽에 위치한 세 개의 장미창도 안전하다고 방금 트위터에 올라온 소식을 접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은 유물들이 많아서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  

평소의 장미창 모습
화재 후 사진으로 알려진 장미창 상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저녁 8시로 예정이던 조세부담 완화 관련 대국민 TV 담화를 취소하고, 노트르담 화재현장을 방문해 "매우 슬프다. 우리의 일부가 불탔다"며 "우리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재건하기 위해 국제 모금 운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각계 각층의 지원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구찌, 발렌시아가, 생로랑 등 세계적 명품 브랜드의 모기업 케링(Kering)은 노트르담 재건을 위해 1억유로(약 1283억원)를 지원하기로 발표하였습니다. 프랑수아앙리 피노 케링 회장은 성명서를 내고 "이 비극은 영적 가치로 연결된 사람들 뿐 아니라 모든 프랑스에 영향을 미친다"며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 한 빨리 우리의 유산을 회복하고자 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케링(구찌, 발렌시아가, 생로랑 등)의 피노 케링 회장

피노 회장이 1억 유로를 쾌척하자 경쟁사인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루이비통, 크리스챤 디올, 지방시, 펜디, 겐조, 불가리 등의 명품 브랜드가 있음)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그 2배인 2억 유로(약 2560억원)를 지원한다고 밝혔습니다.
아르노 회장은 성명에서 "아르노 가문과 LVMH는 이번 국가적인 비극에 직면해 프랑스의 상징인 대성당의 재건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LVMH(루이비통, 크리스챤 디올, 지방시, 펜디, 겐조, 불가리 등)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

이외에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노틀담을 재건하기 위해 기증을 맹세했는데, 그 금액만 6억 7900만 달러(약 8000억)에 이른다고 합니다. 국보 1호인 남대문이 불에 탔을 때의 우리나라의 모습이 생각나서 씁쓸하기도 하네요. 우리의 문화 유산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재일민단(재일동포 단체) 5억 8700만원, 국민은행 5억원, 무한도전 1억원, 박명수 1억원, 유동근 1억원 등 성금 기부가 줄을 잇던 중, 당시 대통령이던 이명박이 "국민 성금으로 복원하자"고 한 마디를 던지면서 모금운동은 곧바로 사그라 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큰 기업들이 숭례문 복원에 기부한 내역은 거의 찾기가 힘드네요.
(신한은행은 숭례문 지킴이 기업으로서 화재 이후 2008년 8월부터 2012년 11월까지 매주 주말 총 340회 이상 2100여 명의 임직원들이 참여해 약 2만7000여 명의 관람객들에게 숭례문의 역사와 문화재적 가치 및 복구 절차 등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 자원봉사를 실시.)

 

방화로 불 타버린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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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월호 참사 5주기입니다.
저 역시도 하루종일 무거운 마음으로 보냈고, 눈물을 몇 번이나 흘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잘못 있는 사람들의 잘못으로 소중한 목숨을 잃었죠.
살릴 수 있었는데 살리지 못했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픈 오늘입니다.
오늘만이라도 노란 나비가 되어 가족들에게 오길 기도하면서 희생자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은 대체로 추모 분위기 속에서 차분하게 진행 되었지요.
안산에서는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식이 있었고, 각계 각층의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세월호 생존학생 장애진 씨의 기억 편지 낭송을 듣다가 눈물을 훔치는 박주민 의원의 모습도 보이고,
(왼쪽은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 두 분 사이 여자분은 민주당 이재정 의원)

유은혜 장관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유가족의 모습도 보이네요.

문재인 대통령도 트위터에 세월호 추모 메시지를 남겨 주셨습니다.

개그맨 박명수 씨는 세월호 참사 5주기를 추모하며 뼈 있는 말을 남기셨지요.
박명수 씨는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인 '박명수의 라디오쇼' 오프닝에서 “오늘이 세월호 5주기다. 5년 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유가족들과 함께 하겠다”고 추모했습니다.
또한 “관련자들이 처벌을 안 받는 것 같다. 누가 어떻게 잘못했는지도 제대로 안 밝혀진 것 같다”고 이야기 하며, “악플을 다는 경우도 있더라.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진실이 왜곡되거나 그러면 안될 것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추모 분위기에 찬물을 얹다 못해 똥물을 얹은 경우도 있었지요.
바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전 국회의원인 차명진이었는데요..
(차명진 간단 프로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후 진보정당인 민중당에서 활동하였으며, 김문수와 함께 노동운동을 하기도 하였지요.(그 후 변절)  1996년~2000년까지 김문수 보좌관을 하기도 하였음. 이후 2006년 경기지사에 나간 김문수 지역구를 물려받아 17, 18대 국회의원을 하였으며, 친이계로 분류되던 인물입니다. 19대,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에 밀려 낙선하였음.)

황교안이 고소 당한 것이 그렇게도 억울했나 봅니다.
페이스북에 아주 저주의 망언을 퍼부어 놨네요. 다음 총선에서 어떻게 되나 지켜 보겠습니다.
차명진 지역구는 부천 소사입니다. 부천 시민 여러분 많이 기억해 주세요.

<차명진의 페이스북 전문>
세월호 유가족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먹고, 찜 쪄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고 진짜 징하게 해쳐 먹는다.
그들이 개인당 10억의 보상금 받아 이 걸로 이 나라 안전사고 대비용 기부를 했다는 얘기 못 들었다.
귀하디 귀한 사회적 눈물비용을 개인용으로 다 쌈 싸먹었다.
나 같으면 죽은 자식 아파할까 겁나서라도 그 돈 못 쪼개겠다.

문제는 이 자들의 욕망이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세월호 사건과 아무 연관 없는 박근혜, 황교안에게 자식들 죽음에 대한 자기들 책임과 죄의식을 전가하려 하고 있다.
보통 상식인이라면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할텐데 이 자들은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좌빨들한테 쇄뇌당해서 그런지 전혀 상관없는 남탓으로 돌려 자기 죄의식을 떨어버리려는 마녀사냥 기법을 발휘하고 있다.

자식 팔아 내 생계 챙긴 거까진 동시대를 사는 어버이의 한 사람으로 나도 마음이 아프니 그냥 눈 감아줄 수 있다.
그러나 에먼 사람한테 죄 뒤집어 씌우는 마녀사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해당 자를 죽이는 인격살인이다.
그래서 못 봐주겠다.
정 의심스런 거 있으면 당신들이 기레기를 꽉 잡고 있으니 만천하에 폭로해라.
대신에 그거 조사해서 사실무근이면 지구를 떠나라.
지겹다.

차명진 같은 인간들에 대해서 일침을 날려 주신 분들도 있습니다.
바로 박주민 의원과 역사학자 전우용님입니다.
먼저 박주민 의원은 페이스북에 차명진 기사를 링크하면서 한 마디 남기셨지요.
"정말 지겹고 무서운 사람은 당신 같은 사람입니다. 우선은 이 말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우용 역사학자 님도 오늘을 추모하며 글을 남기셨습니다.
"사람들이 진보와 보수로 나뉘는 줄 알았는데, 세월호를 겪고 보니 사람과 짐승으로 나뉘더라."

정말 공감가는 말입니다. 여러분, 세월호 같은 사건은 딴세상 사람들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 우리 이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잘못도 없는데 한 순간에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일에 나의 일이 아니라고 지겹다고 찬물을 끼얹거나 막말을 내 뱉으면 될까요?

825명이 숨진 스웨덴 에스토니아호 사건을 보면 우리가 나아갈 길을 알 수 있겠지요.
스웨덴의 경우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사회가 함께 유가족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건 후 3년간의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해 잘못을 하나씩 고쳐 나갔고, 그 결과 좀 더 안전한 사회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지요.

우리도 세월호 희생자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계속 기억도 하고,
또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 사회를 바꿔 나가야 할 의무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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